"나의 귀농 일 년"
전업농부로서의 첫 해가 저물어 간다. 봄부터 가을까지 땀으로 가꿨던 밭이 대부분 비어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앞산의 단풍도 색을 잃어 가니 빈 밭에 남아 있는 마늘과 양파의 초록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스무 살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유학갔다가 그 길로 40년을 수도권에서 머물렀다. 사람과 인프라와 자원이 수도권에 집중되는 것을 늘 비판적으로 생각해 왔다. 지방자치와 관련된 일을 해 왔기에 더 그랬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은 수도권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기득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지방에 내려가서 새롭게 일을 구하고, 사람 관계를 만들면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라고 변명해 본다.
하고 있던 일은 2018년으로 마치게 예정돼 있었다. 그 이후의 생활은 귀촌이 될 것이라고 상상해 왔다. 그러나 막상 그 때가 왔는데도 결행은 쉽지 않았다. 새로운 돈벌이에 도전해 보았다. 스스로도 답이 없는 말과 글을 남들에게 제공하는 일에 짜증만 늘어갔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3시간의 출퇴근에 숨이 막혔다. 3평짜리 텃밭을 가꾸면서 겨우 숨을 쉬었다. 농촌으로 탈출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적게 벌어도 조금 쓰고 마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농촌생활 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아둔 것 없는 나로서는 앞으로 남은 20년을 생각해서라도 최선의 선택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팔뚝에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떠나야 정착이 쉽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돌아갈 고향은 없어졌다. 바꿔 말하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무턱대고 농사부터 시작할 수는 없었다. 농촌지역이나 도농복합지역에 일할만한 곳을 찾았다. 거제에 적당한 일자리가 나왔다. 혼자 원룸에서 생활하면서 완전히 정착할 방법을 모색할 셈이었다. 주말이면 구경삼아 집을 보러다녔는데 마음에 드는 집이 있어서 계약을 해 버렸다. 도시의 높은 집값은 고맙게도 귀촌의 도우미가 돼 주었다. 작고 오래된 아파트를 처분해 텃밭 딸린 전원주택을 살 수 있었다.
거제시 둔덕면 텃밭
직장생활에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지만 텃밭을 가꾸는 전원생활의 즐거움으로 견딜 수 있었다. 다행이 이웃들과 사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귀농을 염두에 두고 농사실습을 해 나갔다. 집과 붙은 땅 350평도 구입했다. 2년 간의 직장생활을 마치면서 마침내 농부가 됐다.
첫 해 농사의 주작물로 생강, 히카마, 고추를 선정했다. 판매를 염두에 둔 작물이다. 히카마는 전량 판매가 가능한 통로가 있었고, 생강은 가공을 하여 판매할 생각이었다. 고추는 판매가 어렵지도 않지만 농부의 필수작물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 농사하지 않았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감자, 고구마, 양파, 마늘, 참깨, 옥수수, 땅콩, 서리태, 녹두, 팥 등 집에서 소용되는 작물도 심었고, 대파, 쪽파, 상추, 아욱, 쑥갓 등 항상 먹는 채소는 텃밭에 심었다. 마침 집 옆에 한 마지기 논이 나와서 벼농사도 할 수 있었다. 돈 버는 작물만 심는 것은 농부의 삶이 아니라 생각했다. 철따라 만날 수 있는 작물로 풍성한 식탁을 만들고 싶었다.
소득은 보잘 것 없었다. 1년 내내 농작물 판매로 번 돈이 450만원 정도고 비용을 제하니 200만원이 조금 넘는다. 짬짬이 가욋일을 해서 번 돈으로 생활비에 보태기도 했지만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생활이 안될 수준이다. 점차 농산물 가공, 체험농업 등으로 일을 확장하여 수입도 늘리고 농촌생활의 정착모델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농지를 대폭 늘릴 생각은 없다. 신규 농업인에게 주어지는 농창업자금 대출을 받으면 가능하지만 상환할 방법이 없다. 경작면적이 커지면 대형기계도 구입해야 한다. 기계에 종속되지 않고 내 근력으로 해낼 정도만 욕심낼 것이다. 화석연료를 사용해야하는 시설재배도 사양한다. 최대한 자연에 맡기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추구할 것이다.
나의 땀으로 자라나는 작물들을 보면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욕심내지 않고 계절의 흐름에 맞춰 자연에 스며들고 싶다. 그리고 한 평생 농촌에 신세지고 살았던 것을 갚아가며 살고 싶다.
윤병국 (농부,경상남도 거제시 둔덕면)
"나의 귀농 일 년"
전업농부로서의 첫 해가 저물어 간다. 봄부터 가을까지 땀으로 가꿨던 밭이 대부분 비어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앞산의 단풍도 색을 잃어 가니 빈 밭에 남아 있는 마늘과 양파의 초록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스무 살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유학갔다가 그 길로 40년을 수도권에서 머물렀다. 사람과 인프라와 자원이 수도권에 집중되는 것을 늘 비판적으로 생각해 왔다. 지방자치와 관련된 일을 해 왔기에 더 그랬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은 수도권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기득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지방에 내려가서 새롭게 일을 구하고, 사람 관계를 만들면서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라고 변명해 본다.
하고 있던 일은 2018년으로 마치게 예정돼 있었다. 그 이후의 생활은 귀촌이 될 것이라고 상상해 왔다. 그러나 막상 그 때가 왔는데도 결행은 쉽지 않았다. 새로운 돈벌이에 도전해 보았다. 스스로도 답이 없는 말과 글을 남들에게 제공하는 일에 짜증만 늘어갔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3시간의 출퇴근에 숨이 막혔다. 3평짜리 텃밭을 가꾸면서 겨우 숨을 쉬었다. 농촌으로 탈출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적게 벌어도 조금 쓰고 마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농촌생활 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모아둔 것 없는 나로서는 앞으로 남은 20년을 생각해서라도 최선의 선택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팔뚝에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떠나야 정착이 쉽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돌아갈 고향은 없어졌다. 바꿔 말하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무턱대고 농사부터 시작할 수는 없었다. 농촌지역이나 도농복합지역에 일할만한 곳을 찾았다. 거제에 적당한 일자리가 나왔다. 혼자 원룸에서 생활하면서 완전히 정착할 방법을 모색할 셈이었다. 주말이면 구경삼아 집을 보러다녔는데 마음에 드는 집이 있어서 계약을 해 버렸다. 도시의 높은 집값은 고맙게도 귀촌의 도우미가 돼 주었다. 작고 오래된 아파트를 처분해 텃밭 딸린 전원주택을 살 수 있었다.
거제시 둔덕면 텃밭
직장생활에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지만 텃밭을 가꾸는 전원생활의 즐거움으로 견딜 수 있었다. 다행이 이웃들과 사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귀농을 염두에 두고 농사실습을 해 나갔다. 집과 붙은 땅 350평도 구입했다. 2년 간의 직장생활을 마치면서 마침내 농부가 됐다.
첫 해 농사의 주작물로 생강, 히카마, 고추를 선정했다. 판매를 염두에 둔 작물이다. 히카마는 전량 판매가 가능한 통로가 있었고, 생강은 가공을 하여 판매할 생각이었다. 고추는 판매가 어렵지도 않지만 농부의 필수작물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 농사하지 않았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감자, 고구마, 양파, 마늘, 참깨, 옥수수, 땅콩, 서리태, 녹두, 팥 등 집에서 소용되는 작물도 심었고, 대파, 쪽파, 상추, 아욱, 쑥갓 등 항상 먹는 채소는 텃밭에 심었다. 마침 집 옆에 한 마지기 논이 나와서 벼농사도 할 수 있었다. 돈 버는 작물만 심는 것은 농부의 삶이 아니라 생각했다. 철따라 만날 수 있는 작물로 풍성한 식탁을 만들고 싶었다.
소득은 보잘 것 없었다. 1년 내내 농작물 판매로 번 돈이 450만원 정도고 비용을 제하니 200만원이 조금 넘는다. 짬짬이 가욋일을 해서 번 돈으로 생활비에 보태기도 했지만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생활이 안될 수준이다. 점차 농산물 가공, 체험농업 등으로 일을 확장하여 수입도 늘리고 농촌생활의 정착모델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농지를 대폭 늘릴 생각은 없다. 신규 농업인에게 주어지는 농창업자금 대출을 받으면 가능하지만 상환할 방법이 없다. 경작면적이 커지면 대형기계도 구입해야 한다. 기계에 종속되지 않고 내 근력으로 해낼 정도만 욕심낼 것이다. 화석연료를 사용해야하는 시설재배도 사양한다. 최대한 자연에 맡기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추구할 것이다.
나의 땀으로 자라나는 작물들을 보면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욕심내지 않고 계절의 흐름에 맞춰 자연에 스며들고 싶다. 그리고 한 평생 농촌에 신세지고 살았던 것을 갚아가며 살고 싶다.
윤병국 (농부,경상남도 거제시 둔덕면)